거실 구석의 택배 상자. 그 안은 어둑하고, 네 벽이 사방을 가려주고, 바깥의 소리는 한 겹 걸러져 들어온다. 오늘도 나는 거기 들어앉아 오후를 반나절쯤 흘려보냈다. 지나가던 집사가 “또 들어가 있네” 하며 웃었지만, 이건 취미가 아니라 필요다.
사냥꾼이자 먹잇감이었던 시절
우리 조상은 사냥꾼이면서 동시에 더 큰 짐승의 먹잇감이기도 했다. 어중간한 크기의 포식자는 늘 그 양쪽에 걸쳐 있다.
그래서 좁고 사방이 가려진 곳에 들어가면 본능이 이제 안심해도 된다고 신호를 보낸다. 등 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그게 숨숨집이다. 상자에 들어간 고양이의 표정이 하나같이 평온한 이유이기도 하다.
국제고양이돌봄협회는 고양이 친화적인 집의 조건에 숨을 곳을 반드시 넣는다. 있으면 좋은 게 아니라 있어야 하는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숨는 것이 우리의 대처 방식이다
사람은 힘든 일이 있으면 말을 하거나 자리를 뜨거나 화를 낸다. 우리에게는 그런 선택지가 없다. 대신 숨는다.
숨을 곳이 있으면 우리는 거기서 마음을 가다듬고 스스로 회복한다. 반대로 숨을 데가 없으면 불안은 갈 곳을 잃는다. 그러면 다른 형태로 나온다. 과도한 그루밍, 화장실 문제, 공격성, 식욕 저하 같은 것들이다.
손님이 왔을 때 침대 밑으로 들어가는 고양이를 두고 성격이 이상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그건 정상적인 대처다. 오히려 숨을 곳을 못 찾아 구석에 몰린 채 얼어붙는 쪽이 더 나쁘다.
좋은 숨숨집의 조건
- 몸이 딱 맞게 들어가는 크기. 넓으면 오히려 불안하다
- 입구가 하나만 있어도 되지만, 겁이 많은 고양이는 두 개인 쪽을 선호하기도 한다
- 위가 덮여 있을 것
- 조용하고 사람 동선에서 벗어난 곳
- 낮은 곳과 높은 곳에 각각 하나씩
마지막 항목이 중요하다. 높은 곳의 숨을 자리와 낮은 곳의 숨을 자리는 쓰임이 다르다. 높은 곳은 지켜보면서 안심하는 자리이고, 낮고 어두운 곳은 아예 세상을 차단하는 자리다. 무서운 정도에 따라 우리가 고른다.
값비쌀 필요는 없다
- 종이 상자. 최고다. 크기만 맞으면 어떤 제품보다 낫다
- 위가 덮인 침대나 텐트형 하우스
- 캣타워에 붙은 작은 굴
- 침대 밑, 옷장 아래 칸
- 이동장. 문을 열어두면 훌륭한 숨숨집이 되고, 병원 갈 때도 편해진다
여러 마리라면 머릿수보다 넉넉하게 둔다. 숨을 곳이 하나뿐이면 그것 때문에 다툰다.
지켜야 할 예의
고양이가 숨숨집에 들어가 있을 땐 혼자 있고 싶다는 뜻이다. 억지로 꺼내지 않는 것. 나올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이 존중이다.
아이가 있는 집이라면 이걸 규칙으로 정해두면 좋다. 숨숨집에 들어간 고양이는 없는 사람으로 친다는 규칙이다.
간식으로 유인해 꺼내는 것도 권하지 않는다. 몇 번 그러면 숨숨집이 더는 안전한 곳이 아니게 된다.
숨는 모습이 달라졌다면
평소에 숨는 건 건강한 행동이다. 다만 이런 변화는 눈여겨봐야 한다.
- 하루 종일 나오지 않고 밥을 거른다
- 늘 있던 자리 대신 이상한 곳에 숨는다. 옷장 깊은 곳, 소파 밑, 서랍 안
- 불러도 반응하지 않는다
- 숨은 채로 화장실도 가지 않는다
- 만지려 하면 하악질을 한다
아플 때 우리는 숨는다. 이것도 본능이다. 야생에서 약한 티를 내면 표적이 되기 때문에, 몸이 안 좋으면 일단 감춘다. 그래서 갑자기 늘어난 은신은 스트레스의 신호일 수도, 통증의 신호일 수도 있다.
며칠 이어진다면 병원에서 확인받는 게 순서다.
새로 들인 고양이라면
집에 처음 온 고양이가 숨는 건 당연하다. 며칠에서 몇 주가 걸리기도 한다.
- 억지로 꺼내지 않는다
- 밥과 물, 화장실을 숨은 자리 가까이에 둔다
- 사람이 그 방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낸다. 말을 걸지 않고 책을 읽는 정도면 충분하다
- 스스로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우리 집 레오도 처음 사흘은 침대 밑에서 안 나왔다. 나흘째 밤에 밥을 먹으러 나왔고, 일주일 뒤에는 온 집을 뛰어다녔다.
천둥 치는 여름밤이면 나도 슬그머니 상자 쪽으로 몸이 기운다. 열세 해를 살아도 하늘 울리는 소리만은 영 적응이 안 된다. 그럴 때 들어갈 상자가 있다는 것, 그게 생각보다 큰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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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International Cat Care, Making your home cat friendly
- International Cat Care, Helping your new cat or kitten settle in
- VCA Animal Hospitals, Recognizing the Signs of Illness in Cats
이 글은 일반적인 정보이고 진단이나 처방이 아니다. 숨어 있는 시간이 갑자기 늘었다면 수의사에게 보이는 것이 좋다.
망구 · 2013년 여름에 태어났다. 흰 바탕에 주황 얼룩을 얹은 치즈냥이다. 냥모상에는 고양이에 관해 알아둘 만한 것들을 적는다. 막내 레오는 아직 배울 것이 많다.
본문에 쓴 자료의 출처는 글 끝에 밝힌다. 건강에 관한 내용은 참고용이니, 아이가 아파 보이면 반드시 수의사와 상의하기 바란다.
문의 giant.mangg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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